서울, 인천 공항은 다들 어떤 의미인 장소일까?
나는 공항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으며, 단 한번도 즐거운 마음으로 가본 적이 없다. 다른 누군가에겐, 색다른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하러 떠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장소일수는 있으나, 나에겐 그저 이별의 먹먹함만 크게 감당해야 하는 장소이다.
일본으로 떠났던 나의 20살은, 처음으로 가족과 이별하여 독립적으로 살아야 했다. 그 때는 인천공항이 아니라, 김포 공항에서 하네다로 출국 했었는데. 1년간 수 많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일본을 가기 위해 대학가는 것도 포기하고 돈을 모으는 일에만 매진 했기 때문에,
막상 출국장으로 들어갈 때는, 당시는 그 결실을 맺는 것 같아서 후련한 마음에 엄마가 우는 것이 가슴은 아팠지만 아주 크게 울진 않았던 것 같다.
그 이후, 나는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살다가, 2011년 대지진 이후로, 나의 일본 유학은 중단이 된 상태에서 2012년, 미국으로 운이 좋게 가게 된 계기가 생겼다. 나는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과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눈이 녹도록 울었던 것 같다.
일본은 비행기로 길어봤자 2시간일 뿐인 거리와 비교해서, 미국 동부는 환승을 하게 되면 14시간 이상 비행은 기본, 레이오버 까지 겹치면 18-20시간 까지 비행을 해야 하는 때도 있다.
태평양을 건너고 건너, 비행기에서 주는 두 끼 식사를 먹어야 하고, 잠을 자고 허리와 무릎이 아플 정도로 앉아서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내 나라. 나의 가족이 살고 있고, 내 친구들이 살고 있고, 내 소중한 기억들과 추억들이 영원히 머무는 곳 서울과 경기도 과천.
캘리포니아 나 시애틀 쪽으로는 직항은 참 많은데, 미국 동부는 직항이 참 비싸고 적다. 비행기 값도 만만치 않고, 한 번 오면 거의 이틀정도는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1일 차이) 내가 한국을 쉽게 가기도, 한국에 있는 사람이 미국을 오기도 쉽지 않다.
한 번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인천공항에서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나의 발걸음은 언제나 만 톤처럼 무거웠다. 출국장 입구 끝까지 와서 내가 들어갈 때 까지 확인 하는 우리 엄마, 아빠의 얼굴을 보는 것도,
보고싶은 딸내미 얼굴 끝까지 보러,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인천공항까지 항상 배웅해주는 부모님도, 곁에서 항상 챙겨주고 싶고, 고생하는 부모님의 늙어가는 모습을 하루 하루 담지 못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으로, 나는 인천공항이 절대로 편한 적이 없었다. 출국장 들어가기 전에, 세큐리티 첵 하는 곳에서 부터 난 이미 눈이 붉어지고 눈물 방울이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나에겐 공항이란 그런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때도, 나는 공항이 참 싫었다. 떠나보내는 그의 얼굴을 계속 만져보기도 하고, 그를 꽉 안고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해 그 품을 기억하려고 안 놓아 주었던 기억이 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그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저 멀리 면세점 앞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그 사람이 사라질 때 까지 기다렸다. 못내 그 사라지는 순간도 그렇게 안타깝고 아쉬울 수가 없었더랬다. 그것이 사랑이 주는 엄청난 힘이 였다. 그리고 그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배로 커져,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그 길에 눈이 녹도록 울었더랬다.
아마, 이별하는 경험은 나도 모르는 새에, 그리고 내가 원하지도 않은 새에 그렇게 쌓여가는 것 같았다.
공항에서의 이별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 또한 마찬가지일테지만, 살아가면서 만나오고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도 이별을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참으로 다양하였다.
시간이 안돼서, 시간이 지나서, 자주 만나지 못해서, 일본에 가서, 미국에 와서, 내 관계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사람들도 더러 많이 존재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떠나보내고, 그렇게 기다리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별이더라. 나는 왜, 이별이 그렇게 힘들걸까. 나는 왜, 그렇게 정이 너무나 많고 쓸데없는 사소한 것들, 작은 것들이라도 소중하고 소중한 걸까. 그래서 가슴이 매번 찢어지고, 아쉽고, 후회만 가득인걸까.
익숙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힘들어 지는 것이 이별이다. 나이를 먹으면 덤덤해진다고 하는데, 오히려 새로운 이별들이 늘어간다.
지금 내 나이가 그러한 것 같다. 올 해와 작년이 특히 심했다.
나의 소중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와는 미국 유학을 시작으로 연락이 끊겨 이제 더 이상 닳을 수 없는 관계들도 많아지고, 내가 카톡을 보내고 답장이 올 수 없게 하늘나라로 가버린 친구도 있다. 그리고,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영원할 거라 믿었던 사람과 헤어지고, 이별하고,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경험을 해야 했다.
많은 종류의 이별을 경험해도, 항상 무너져 내리는 것은 똑같았다. 그래서 더러, 더 불안하더랬다.
먼 타지에서 혼자 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들고 불안한 것의 단연 탑은 바로 :
내가 먼 곳에서 어찌 하지 못할때 갑작스럽게 엄마가 아프거나, 아빠가 아프거나, 혹여나 사고라도 당해서,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이별을 겪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나는 매일매일이 불안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눈이 불편하고 아프신 아빠,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사는 우리 엄마. 오빠도 마찬가지고. 내가 챙겨줄 수도 없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는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다면, 나는 최소 비행기를 알아보고 결제하고 한국으로 날아가기까지 꽤나 걸릴 텐데.
미국에 사는 게 가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지랄로 사는지 모를 때가 많다. 내가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힘들고 아플 때, 내가 곁에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나의 불안감은 한 동안 한국에 없었다가, 간만에 들어간 한국의 인천공항에서 엄마, 아빠의 얼굴을 보면 배로 더 해지곤 했다. 내가 없는 새에, 엄마 아빠의 주름은 더 깊어져만 갔고, 내가 알지 못했던 병들을 겪고 있었고, 아파했었다.
먼 타지에서 사는 딸내미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집 안에 안 좋은 소식이 있어도 엄마 아빠는 어디가 아픈지 나에게
꼭꼭 숨기셨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코 끝이 따갑고 눈물이 고인다. 정말 가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나뿐인 딸내미가 이러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 더욱 더 슬픈건, 엄마 아빠는 아무 걱정 하지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고 건강 챙기라는 말뿐이다. 단 한번도, 내가 멀리 사는 것에 섭섭하다거나 하시지 않는다. 그저, 내가 행복하게, 건강하게, 아프지 않게 바라는 마음이 더 클 뿐. 나는 두 분과 이별을 하게 된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항상 오빠와 나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엄마 아빠와 갑작스럽게 이별을 하게 된다면.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걱정했던 일은 더 빨리 일어났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하나뿐인 할머니, 외할머니가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는 소식이였다.
나는 가족이 외가 뿐이다. 친가는 내가 태어났을 때에 고모 밖에 존재 하지 않았고, 고모도 만난 기억이 흐릿할 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외가는 나에게 가장 특별하다. 나에게 "친척" 이란 개념을 심어주고, 핏줄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정을 가르쳐 준 [집단]이라고나 할까. 그 중에서 나에게 외할머니는 특별하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엄마를 주셨고,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닮은 그 마음 씀씀이와 정성을 손녀인 나에게 그대로 주신 분 중 하나다. 엄마, 그리고 나의 이모들, 삼촌들은 다 고대로 외할머니한테서 배운 정을 지닌 것 같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혼자서 다섯 자식을 시골에서 혼자 키워내신 외할머니는, 재혼 조차 안하시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평생 바라만 보시며 자식들을 키우셨다.
친척 언니들과 오빠, 동생들이랑 다 같이 시골에 가서 외할머니 음식들을 먹는게 가장 나에겐 신나는 일이 였고, 명절에 내려가기 싫은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나에겐 가장 신나는 일이였다. 할머니가 해주신 김치와 깍두기는 세상 어딜 가도 할머니보다 잘하는 곳을 찾기 힘들었으며,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일이 가장 기분이 좋았다.
항상 집에 가기 전에, 차를 타러 가면, 그 바지 주머니에서 고추를 팔고, 뭐를 팔고 해서 겨우 남은 돈과 할머니가 이모들한테서 용돈 받은 쌈짓돈 반 갈라서 꼭 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할머니는 그랬다. 내가 되었다고 진짜로 거절하고 거절해도, 할머니는 항상 그랬다. 그리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더 먹이고 싶은지 항상 창고를 열었다, 음식들을 꺼냈다, 쌀을 싸고, 멜론을 싸고, 떡도 싸고,.. (엄마는, "엄마, 그만 줘!! 소연이 좀 봐 살 빼야해 저거!!!" 라고 하면 할머니는, "살을 뭐땀시 빼! 그런 소리 하는거 아녀!" 라고 항상 방어해주셨다.)
그래서 항상 집으로 돌아오는 차의 트렁크는 할머니의 사랑과 마음으로 가득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그리고, 항상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마당 앞 쪽 끝까지 나와서 손을 흔드셨다. 할머니가 적적하게 시골에서 지낼 혼자서 서 계시는 모습을 한참이나 뒷자석에서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본 그 나날들이, 아직도 나에겐 선명한데.
2주 전, 한 참 밖에서 밤 9시에 10키로를 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빠가 보이스톡으로 전화가 왔었다. 오빠와 나는 그리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고 사는 사이), 부재중 통화가 왔었을 때는, 정말 심장이 아래로 내려간 기분이였다. 오빠는 다행히 빨리 전화를 받았고, 많이 안 좋은 목소리로,
지금 공주에 있는 병원인데,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알렸다.
분명히, 한국에 있었을 때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할머니 얼굴을 보고 왔었는데. 그럴 때 마다, 아냐, 내가 한국으로 아예 들어가기 전 까지 할머니는 살아계실 거야. 이렇게나 정정하신데. 라고 생각하고 왔었는데, 이럴 수가.
오빠가 전화로, 한국에 빨리 들어오는게 나을 것 같다고 한 후, 멍한 상태로 비행기 값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성수기 인지라 비행기가 최고로 싼게 250만원에 두바이에서 심지어 18시간 레이오버다. 250만원이라니, 지금 혼자 살아야 해서 긴축 모드로 돌입하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250만원이라니. 심지어, 비행시간은 14시간인데, 18시간 레이오버야. 가면 돌아가시는거 아냐?곧, 8월 중순이 학교 개학이고, 책도 렌탈하려면 20-30만원은 또 들텐데. 하면서 나의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 걱정이 되는게, 참으로 비참할 수가 없었더 랬다.
샤워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 꿇고 울었다. 오열을 했었다. 왜, 작년도 그렇고 올해는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최선을 다해서 살고있을 뿐인데,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신 당하고 다시 보지 못할 평생 이별을 해야하고, 할머니 마져 보낼 준비를 해야하냐고. 내 주위에 가족을 잃고 친구도 잃은 사람들이 있었을 때, 한국에 가지도 못해 그 들 곁에 있어줄 수도 없었는데, 할머니 마저 보내야 겠냐고. 나는 정말 여태까지 눈이 마르도록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엄마와의 통화에서 나와 엄마는 당장 한국에 가지 않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할머니가 치매가 심해서 내가 와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에서인데. 엄마와 전화할 때, 나는 엄마에게 많이 미안했다.
엄마, 미안해. 딸인데, 엄마가 가장 슬플텐데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할머니한테 당장 가지도 못해서 미안해. 내가 진짜 부자였으면 좋겠다.
다행히 그 뒤로, 할머니의 증세는 나아지셨으나 아직도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중이시라고 한다. 그 날을 계기로, 이모들과 삼촌들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영정 사진과, 장례식 장을 다 알아보셨다고 하셨다.
나는 요새, 내가 이별할 만큼 경험은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뭘 해도, 소중한 사람과의 작별은 덤덤해질 수도 없을 뿐 더러, 익숙해지지도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그저 눈물이 조금 줄어들 뿐, 하지만 슬픔과 가슴 아픔은 더뎌지거나 덜 해지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체험하는 중이다.
할머니, 공부 열심히 하고, 열심히 살아서 한국 갈게. 할머니가 치매가 심해도, 내가 작년에 시골에서 다시 집으로 가기 전에 할머니가 내 손 꼭 잡고 용돈 줬잖아. 방금 점심 잡수신 것도 까먹었었으면서. 그저, 손녀라면 좋아서 병원에 잠깐 가서 있었을 때도, 내 손 놓치 않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심정지 왔었다는 소식에 나도 심정지 오는 줄 알았어.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는 매 순간, 매 아침이 나는 여전히 괴롭다. 언제든지, 한국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한국을 가는 일이 좋은 일로 가고 싶은데. 세상을 참 많이 원망했고, 여전히 원망 중이다. 그러나 어찌 하리. 이별을 받아 들이는 것도 내가 나이 먹어 가는 일 중에 하나 인 것을. 덤덤해 질 수 없음에 힘들 뿐이다.
제 2부는 아마,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하는 편으로 갈 것 같다. 2년 동안, 나는 참으로 많은 이별을 겪어야 했고, 봐야했고, 주위 사람들을 보내야 했기에, 정말이지 기억하는 것 조차가, 힘들고 괴롭다. 그렇지만 남겨야지. 스스로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테니까.
타지생활은 참 쿨하지 못해 (0) | 2019.08.16 |
---|---|
감성의 끝장판 (2) | 2019.08.15 |
나는 지금 어디에. (0) | 2019.08.03 |
UTOPIA 아니고 ZOOTOPIA. (0) | 2019.08.01 |
투쟁기를 기록하다. (0) | 2019.08.01 |